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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를 붙들고
나기철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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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08  16:4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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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기철 시인
김광렬 시인이 지난 해 말 여섯 번째 시집 『내일은 무지개』(푸른사상)를 펴냈다. 초기 시로부터 일관한 자성의 목소리가 여전하다.

우리 시에서 이처럼 끊임없이 ‘부끄러움’을 토로하고 있는 시인도 드물다. 나는 그의 첫 시집 『가을의 詩』(1991, 창작과 비평사)의 발문에서 그의 시에 대해 ‘윤동주적 성찰’이라 쓴 바 있는데, 이런 음성이 이렇게 오래 계속될 줄은 몰랐다.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허나 생활에 묻혀 지내며 그걸 묻어 버리거나 자기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그래 성인이 ‘一日三省’을 말하고, 가톨릭에서 수시로 고백의 시간을 가지며, 이슬람 국가에서는 하루 다섯 번의 기도 시간을 두어 늘 자신을 돌아보게도 한다.

그런데 이 시인은 수십 년간 늘 부끄럽다고 한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이래야 한다고 대신 말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은 아파하는 사람을 대신해 신음하는 자이기도 하니까.

‘커피가 니그로의 눈물이라면/사막이 낙타의 고통이라면/촛농이 대한민국의 아픔이라면/바람은 제주의 한숨//나는 여태껏 니그로의 눈물을 마셔왔고/얼마 전에는 사막의 낙타를 탔었고/지금은 제주시청 앞에서 촛불을 켜 들었고/아주 오래 전부터 제주의 한숨 속에 살아왔다//몰랐다, 나는//내가 마신 커피가 채찍의 핏자국이었다는 것을/내가 탔던 낙타가 고통으로 뭉쳐진 고름 덩이였다는 것을/내가 켠 촛불이 사람들의 찢긴 가슴이라는 것을/내가 호흡한 바람이 눈물로 범벅된 한숨이었다는 것을//모든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뿐/통증은 잎사귀에 잠시 몸살 앓다 가는/바람 같은 것이라 여겼을 뿐.//이제 부끄러움이/못 견디게 나를 부스럭거리게 한다‘(‘부끄러움이 나를 부스럭거리게 한다’)

김광렬 시인의 이번 시집은 구체적 정황에서의 느낌을 나타낸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로 대별된다. 내게는 전자의 시들이 더 잘 읽힌다. 겨울옷을 받았을 때, 차를 마실 때, 그림을 볼 때, 촛불 광장에서, 마이산에 가서, 등나무 꽃을 보며, 도서관 앞뜰과 서고에서, 핵실험 영상을 보며, 전쟁 영화를 보며, 공연장 옆자리 여인과, 큰아버지 유골 앞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들들을 서울에서 만나, 공중전화 부스의 청년을 보며, 연탄을 나르며, 한라산 구상나무를 보며, 집에 온 중년 수리공 부부를 보며, 등.

그는 늘 ‘시를 붙들고 죽어라고 놓지 않는다’(‘뼈다귀를 문, 시인’). ‘詩 三百 思無邪(사무사)’라 했으니 일상의 언제 어디서건 시와 함께 늘 부끄러워하며 사람이 가야할 길을 생각할 것이다.

‘까만 옷 뒷덜미에 하얗게 비듬이 내려앉듯/빵부스러기들이 식탁에는 물론/마룻바닥에도 내려쌓여 있다./…/그런데 오늘 아침 빵부스러기들 위에/그 꿈 조각들이 겹쳐지는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막연히 혼란스럽고 불안하고/평화롭지 못한 심리 상태의 간접적 표출?/어쨌거나 아침식탁 주변에는/꿈의 파편들처럼,/국제 정세 속의 우리나라처럼,/빵부스러기들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다/트럼프와 김정은의 가시 돋친 설전(舌戰)이/설마, 하는 사이/무모한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빵부스러기들’)

‘…너는 나에게로/나는 너에게로 다가가/사랑한다는 말 건넸으면//핵이/사드가/공포로 자라나는 이 땅에//사랑한다는 말이/그 위를 하얗게 덮었으면/파릇하게 물들였으면//꽃 피는 봄날이/왜 이리 우중충한가,//핵 사드 다 버리고/서슴없이 다다가//서로 힘껏 껴안았으면’(‘꽃 피는 봄날에’)

어제 “한반도에서 끔찍한 전쟁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 미 합참의장의 말이 끔찍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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