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신문
오피니언제주칼럼
가부장제와 성폭력의 기원
김준표  |  박사/제주대 사화학과 강사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3.20  13:01:5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 김준표 박사
창세기 6장 서두에 이런 기록이 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이 이야기는 하나의 신화다. 신화를 현실적으로 풀어놓으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땅을 일구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들은 피지배 상태에 놓여 하늘같은 신분의 사람들에게 차별을 받는다. 하늘과 땅 만큼의 신분차이가 생겨난 것이다. 하늘같은 집안의 아들들은 땅에 붙어 먹고사는 딸들의 성적 매력에 끌려 저마다 마음에 드는 여자들을 자기 마음대로 취했다. 5장에서 남자들의 족보를 정리한 직후에 배치된 이 이야기를 통해 가부장제가 성폭력의 기원임을 알 수 있다.

창세기 34장에는 또 다른 성폭력이 등장한다. 야곱의 가족들이 세겜땅에 머무를 때의 일이다. 야곱과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가 그 땅의 추장인 세겜의 눈에 들어 성폭행을 당하게 된다.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해 욕을 보인 후 청혼했다. 이야기 속에 디나의 목소리가 남아 있지 않기에 이 사건이 디나와 세겜의 사랑이었는지 세겜의 성폭행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야곱의 아들들은 디나의 입장과 상관없이 집안을 욕보인 세겜과 그 부족의 남자들을 몰살함으로써 복수한다.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키는 가부장제화의 과정이 성폭행과 남자들 세계에서의 성적 소유물 전쟁으로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일처 다첩이었고, 야곱은 일부 이처 다첩이었다. 가부장제에서 가장의 자리는 아버지의 소유를 아들이 취함으로써 이어지는데, 아버지가 상속을 늦추게 되면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를 넘어섰다는 의미로 아버지의 여자를 취하기도 했다. 야곱의 아들 르우벤은 자신의 배다른 형제의 어머니인 야곱의 두 번째 첩이자 네 번째 여자인 빌하와 관계를 맺는다. 다윗왕의 유력한 왕위계승권자인 압살롬은 아버지의 궁궐 옥상에 장막을 치고 아버지의 후궁들을 취하는 쇼를 자행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힘이 어떤 경로로든 남아있으면, 자신을 욕보이지 않은 다른 아들에게 상속함으로써 죽어서도 가부장의 권위를 남겨두려고 했다. 야곱은 넷째 아들 유다에게, 다윗은 솔로몬에게 상속한다.

한편 남성에게 종속되는 가부장제화가 진행되는 동안 공식적인 일부관계 이면에서 여성의 성적 지향이 다자연애 형식으로 남아있었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는 이집트왕 파라오, 그랄의 블레셋왕 아비멜렉과 관계를 유지했으며,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그랄의 블레셋왕 아비멜렉과 관계가 있었다. 창세기는 기록자의 의도에 의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바로와 아비멜렉과 성적인 관계까지 가지는 않았다고 기록했지만,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자의 태를 닫았다가 사라의 일이 해결된 후 출산을 할 수 있었다는 기록은 사라와 아비멜렉의 관계가 최소한 1년 넘게 이어졌음을 알려준다. 보디발의 아내는 청년 요셉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자 역으로 성추행당했다며 요셉을 감옥으로 보내기도 했다.

가부장제가 강화한 여성에 대한 의무, 집안의 씨를 이어야 한다는 출산의 멍에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롯의 두 딸은 멸망한 소돔을 떠나 소알의 산골짜기에 머물면서, 씨를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술 취한 아버지와의 관계로 자식을 낳았으며,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를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게 된다. 성매매의 화대로 유다가 생각한 것은 가축이었고 다말이 생각한 것은 자식이었다. 다말은 쌍동이를 낳고 다윗왕의 10대조 할머니가 된다.

지금으로부터 멀게는 5천년 전, 가깝게는 3천년 전의 이야기들이 담긴 창세기는 가부장제와 성폭력의 기원을 보여주고 있었다. 과거의 이야기든 현재의 이야기든 우리는 긍정의 시선으로만 읽어서도 부정의 시선으로만 읽어서도 안된다. 긍정의 자기합리화와 부정의 비판적 자아성찰은 늘 함께 있어야 한다. 굳이 하나에 치우쳐야 한다면 비판적 성찰이 더 낫다. 무조건적인 지지는 무조적전인 비판보다 공동체를 더 병들게 한다. 이 글로 불편해질 기독교인이 있다면 이 독을 건강한 영혼을 위한 극약으로 삼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저작권자 © 제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고충처리인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63113)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공로 9-1(도두일동)  |  대표전화 : 064)744-7220  |  팩스 : 064)744-7226
법인명: ㈜제주신문  |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제주 아 01014   |  등록일 : 2007년 10월 24일  |  대표이사:전아람  |   발행인:전아람
편집인:전아람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전아람
Copyright 2011 제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ejupress@jejupres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