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기철 시인

‘연백시사然白詩社’ 모임에 가려고 전날 오전 올라가 교보문고로 직행했다. ‘연백시사’는 근 이십 년 째 계속되고 있는 인문학 공부 모임으로 회원은 거의 시인들이다. 많은 때도 있었지만 이즈음은 열 명 정도다. 한 달에 두 번 일요일 오후에 갖는데, 최근 책을 낸 저자를 초청해 세 시간 동안 얘기를 듣고 토론한다. 대학 개강처럼 3월 초에 시작해 6월에 끝나고 9월에 개강해 11월에 끝난다.

서울에 가도 향하는 곳은 전철에서 내려 대개 광화문 거기다. 책장 사이에 앉아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을 차지하고 이 책 저 책 가져다 읽는다. 시간이 얼마가 자났는지도 모르는 무아지경이 계속된다. 여기서의 책 포식은 졸음도 위장 장애도 없다. 그러다 나오면 밖은 캄캄하나 내 정신은 환해지고 씻은 듯 개운하다.

거기서 꼭 들리는 데는 시집 코너로 문지시선, 창비시선, 민음시선이 늘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 모더니즘, 리얼리즘 계열이 아직도 대세다. 신간 시집들을 진열해 놓은 곳을 보니 ‘민음의 시 242, 244’가 나란히 있어 보니, 이런! 둘 다 ‘제주 출생’이라는 게 눈이 확 띈다. 다 2, 30의 여성 시인들이다. 반갑고 대견하다. 문보영의 『책기둥』과 배수연의 『조이와의 키스』. 문보영의 시집을 두른 띠에는 ‘제36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이라고도 적혀 있다. 이 아가씨(?)들이 제주에서 고교를 나와 낯설고 물 설은 서울에 와 세상과 얼마나 불화 또는 동화도 했기에,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이들의 내력은 잘 모르지만 ‘제주 출생’만으로도 반가워지니 나도 이젠 어쩔 수 없는 제주 사람이다.

연초 경향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에 당선된 이도 제주에서 고교를 나온 지혜라는 젊은 여성이어, 제주 여성 문학적 유전자의 빛과 향이 바야흐로 때를 만난 느낌이다.

나는 결국 ‘장 콕토 시집’, ‘욥의 노래’와 신간 문태준 시집 등을 사서 나온다. 발레리가 말한 ‘보행의 언어’보다 ‘춤의 언어’로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음 날 오후 합정동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다 4호선으로 바꿔 혜화역 4번 출구에서 내려 부근 세미나실 토즈 대학로점에 가니, 세 시가 다 돼 거의 와 있다. 좌장 격인 몇 년 전 K대학 국문학과를 퇴임하신 평론가 겸 시인 C 선생의 머리가 더 희어진 듯하다.

지난 번 릴케 전공의 김재혁 교수에 이어 오늘 초청 손님은 제주 출신 현순영 평론가다. 그래 역시 제주 여성이 대세다. 그녀는 얼마 전 첫 평론집 『응시와 열림의 시 읽기』(서정시학)를 냈다. 제주에서 대학을 나와 여기서 석박사를 하고 2013년 시지(詩誌)에서 ‘움직이는 기억과 삶, “무수한 나”-나희덕의 시가 『야생사과』에 이르기까지’로 등단했는데, 그새 4백 여 페이지의 두툼한 책 분량의 평론을 썼다. ‘구인회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제주 출신 문학평론가로 문혜원, 양경언에 이어 평단의 기대주다.

그녀는 여고 시절엔 문예부 활동을 하며 소설을 쓰고자 했다고. 중 3 때 집에 있는 시선집 등에서 4백여 편의 시를 베껴 쓴 적이 있는데, 시를 읽는 것이 삶을 응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사는 일과 쓰는 일의 균형 잡힌 상태, 사는 시간을 충실하게 보낸 시인은 그것이 시에 배어난다고 생각한다고. 체험의 흔적이 있는 시를 좋아한다며 이즈음 젊은 시인들의 상상력 위주에 대한 시들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말했다.

‘매우 쑥스럽게 고백하자면, 나는 시인들의 언어를 응시함으로서 나 자신의 사랑과 삶을 환하게 열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시인들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얻어 배우려 했던 내 분투기인 셈이다’

끝난 후 함께 식사를 하고 또 생전에 김영태 시인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혜화동 로터리의 한 찻집까지 간 후 우리는 헤어졌다. 몇몇이 지하철 열차를 기다리는데 현 평론가가 옆에서 내게 물었다.
“선생님, 저 오늘 어땠어요?”

“순영, 오늘 베리 굿!”

그녀와 나는 30년 전 문예부 시절로 돌아가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