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희성 농부시인

남북 관계에 기상천외하게 훈풍이 불면서 고향, 망향, 상봉 같은 단어들로 화제가 꽃피고 있습니다.  

제 어머니가 고향땅을 등진 것은 꽃다운 나이 새댁이었을 때입니다. 그곳은 갈사만 쪽 바닷바람과 지리산 계곡물 소리가 만나 꽃을 피우고 과실을 맺는 산골마을입니다. 큰 산 깊숙이 더 들어가면 청학동이고 은어 향에 이끌려 발길을 돌리면 섬진강 화개장터입니다. 봄이면 매화며 산수유 축제, 쌍계사 벚꽃놀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다 몰려들어 시끌벅적한 고장, 하동이 바로 어머니의 고향입니다.

이 물색 곱고 물산 풍부한 섬진강 동쪽마을 하동(河東)을 어머니는 어인 일인지 떠난 것도 아니고 등졌습니다. 가난이 이유라 했습니다. 큰 누이 낳고 삼칠일도 지나지 않아 밭일을 해야 하는 궁색한 집안이었습니다. 밭 한 뙈기 자기 몫이 없던 아버지도 고향땅에 정이 깊지 않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여기 말고 어디 세 식구 풀칠할 데가 없을까 싶어 봇짐을 싸 가닿은 곳이 운천 땅이었습니다. 그 무렵 어머니 뱃속에 있던 나는 이런 사연으로 해서 삼팔이북이 고향이 됩니다.
처아버지께서는 공산주의들의 패악 때문에 평안남도 평강 땅에서 월남하신 경우입니다. 특히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심했답니다.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나이어린 누이와 함께 잠시 몸을 피했다 돌아온다는 것이 평생 이산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다시 가정을 꾸리고 천수를 누리셨지만, 늘 가슴 한 구석 실향의 한이 깊었습니다. 그 실어증의 세월, 멀미 때문에 자동차도 멀리하셨던 어른이 자전거를 타고 즐겨 찾던 곳이 동대문 운동장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열리던 축구경기를 보러 삐그덕 삐그덕 전농동에서 동대문까지 자전거 페달을 밟으셨습니다. 일 나가는 것 말고는 도대체 어디를 다니는 법이 없던 어른에게 유일한 나들이는 이렇게 고향땅에서 즐겨보던 축구 경기를 보러 가는 일이었습니다.

큰처남이 경기도 파주땅 이북5도민을 위해 조성한 동화경모공원에 묏자리를 봐두었다는 얘기를 흘려들으시는 듯하더니 어느 날, 멀미를 마다하고 훗날 당신이 누우실 묏자리를 찾아 둘러보신 일은 이변 중의 이변이었습니다.

“참, 가깝구나, 야!” 이 한마디가 장인어른이 오두산전망대 쪽, 손에 잡힐 듯한 북녘을 가리키시며 깊게 토해내신 망향가였습니다.
부모님과 장인어른은 결국 같은 실향민이었습니다. 실향민이되 망향의 방식은 조금 달랐습니다. 한쪽은 언제라도 가볼 수 있는 곳이지만 그리움으로 남겨놓은 경우고 한쪽은 ‘가고 싶어도 결코 갈 수 없어’ 서러운 한으로만 호명하는….

그러고 보니 저도 실향민입니다. 고향 떠나 제주에 와 산 지 벌써 10년째입니다. 지금껏 한 스물 몇 번을 이사하며 살았는데, 따져보니 제주에서 산 것이 두번째로 오래되었습니다. 아예 ‘신풍리 정씨’로 개파를 할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만큼 제주에 정도 들고, 살기 좋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는 형편이 아무리 비단방석 위라 해도 고향만큼 못한가 봅니다. 제 양가 부모님들이 그랬습니다. 일가를 이루고 살림살이도 넉넉해지니 자주 입에 올리시는 것이 고향 얘기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동 고향에 내려가보고 싶다거나,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으로 이북 가족을 만나봐야겠다는 말씀들은 삼가셨습니다. 오랫동안 등진 고향, 그리움으로 잘 둘러싸놓아 생채기가 아문 그 시절의 아픔이나 말 못할 비통함이 다시 비어져 나올까 두려우셨나 봅니다.

저는 다른 이유로 고향을 찾기가 두렵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기억 속의 그 풍경들이 다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고작 환갑 나이에 ‘정 붙이며  사는 곳이 고향이지, 암!’ 이리 웅얼거리자니 신파조가 되어 버릴 것 같아 말도 조심스럽습니다.

언제부턴가 고향을 떠올릴 때면 ‘기승전→어머니품’으로 상념이 정리되곤 합니다. 따져보니 바깥세상 고향에 나오기 전, 내 생을 받아 나온 원초의 고향이 어머니 태중입니다. 어머니 품을 떠올리면 기적소리가 들립니다. 한 유명가수가 부른 ‘고향역’이 배경음악으로 깔립니다.

저는 올해 5월 8일도 제주에 떨어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불효자식입니다. 카네이션 한 송이 달아드리지 못하는 죄책감을 숨기려 괜히 전화 소리 목청을 돋우는 푼수뙈기입니다.

가정의 달입니다. 어버이날이 낼 모레이고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