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순복 동화작가

어제는 행간의 여유시간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장미가 가득한 정원에 친구와 잠시 다녀왔다. 정원 돌담에 형형색색의 덩어리로 피어 있는 장미꽃을 바라보며 문득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는 유년기로 시간여행을 했다.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는 한적한 농촌 마을인데 해마다 장마철이 되면 돌담마다 뻗은 덩굴장미들이 이 집 저 집 울타리를 넘어 인사를 했고 기압이 낮은 날이면 장미꽃 향과 귤꽃 향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마을 전체가 곧 밭이었고 집안에 꽃을 꽂아 놓을 필요도 없이 집집마다 달리아와 하얀 백합이 무더기로 피었으며 차츰 향이 짙은 치자꽃까지 피면 마을 전체가 꽃향기 가득한 꽃밭이었다.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어 봐도 이율 높은 사채 이자를 갚기에 급급했던 시절, 먹을 것이 없어서 잔디 뿌리를 뽑아 하얀 줄기 부분을 씹으면 단물이 입안을 적시면 참 행복했다.

어쩌다 운이 무지 좋은 날 커다란 사탕 한 알 받으면 세상을 다 얻은 듯 얼마나 행복했던지.

감저 빼떼기(고구마를 얇게 썰어서 말린 것)를 삶을 때 당원이나 사카린을 넣어서 삶고 솥 바닥에 눌어붙은 커피색 단물을 긁어먹는 맛은 황제의 밥상에 비할까?

쌀이 모자라 밥을 지을 때 고구마를 썰어 넣어 밥 양을 늘려 먹어도 가족끼리 얼마나 행복했던가?

동네잔치날 신부 밥그릇에 담긴 하얀 쌀밥 한 수저씩 나눠 주면 그 부드럽고 달달한 밥 한 수저가 주는 행복은 또 어떻고.(옛날에는 신부가 밥 한 그릇을 다 먹지 않고 일부러 남겨주었다)

요즘 아이들에게 옛날에는 먹을 것이 궁했다 하면, 라면이라도 먹지 왜 굶느냐고 반문하는데 허허하니 쓴웃음이 나올 수밖에.

어쩌다 친구들이 모이는 날엔 값이 비교적 저렴한 국수를 한 움큼 넣어 적당히 익을 때까지 끓인 후 라면 한 개를 넣어서 풀같이 끓이고 나눠 먹는 그 맛에 따라오는 기쁨이 행복이었다.

친구들과 낮에 주워 온 삭정이(소나무 가지가 말라 삭은 것)나무 같은 걸로 굴묵을 때워 놓고 좁은 방 안에 낡은 목화솜 이불 하나 덮어 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불속으로 다리를 펴 서로 간지럼도 태우며 꿈도 같이 꾸고 희망의 불도 같이 지피던 시절, 그 시절이 참으로 행복했다.

여름이면 입술이 파래지도록 냇물에서 헤염(수영)치며 같이 놀던 친구들과 지천으로 널려 있는 진달래를 꺾고 삐삐를 뽑으며 배가 고파도 희망이 있던 내 유년시절이 자꾸만 그립다.

달 밝은 밤이면 동네 골목길에서 교회서 배운 율동도 하고 가위 바위 보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낮이면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자치기와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로 손등이 다 트고 갈라졌고 곱을락(숨박꼭질)과 막을락(두 줄을 긋고 그 선 안에서 상대팀이 넘어가지 못하게 막는 놀이)을 하며 놀기만 한 것 같은데,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얼른 어른이 돼서 구두도 신고 핸드백도 메고 시집도 가야지 하는 꿈 말이다.

요즘 청년들에게 그런 내 유년의 시간을 물려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여름날 뙤약볕에 땀 흘리며 밭에 잡초를 메며 힘들어 했던 그 시절이 진정 행복하였다는 것을, 할 수만 있다면 나는 7포 세대의 청년들을 이끌고 내 유년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수눌음으로 아무리 힘든 일도 같이 하며 잘 살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던 시절, 아름다운 강산과 다정한 이웃들과 더불어 오손 도손 살아가는 정겨운 세상으로 젊은이들을 데려가고 싶다. 운동장 하늘에 휘날리는 만국기를 보며 촌스럽게도 머리에 청군 백군 띠를 매고 목이 터져라 응원하던 어린 시절, 그 마을과 학교 운동장 담벼락에도 지금처럼 향 좋은 장미는 벙뎅이지게(덩어리) 피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