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상배

지난 5월 15일 9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조그마한 아파트, 가로등만이 길을 환하게 비추는 모두가 잠든 새벽, 휴대폰의 시계를 보니 4시다.

삐삐삐….

‘화재경보기가 오작동을 하고 있나?’하는 생각에 잠이 덜 깬 아내와 함께 방에서 나왔다. 화재경보기에서는 “화재가 발생했으니 모두 대피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 음성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나 거실로 나와 도로를 봐도 가로등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쾅쾅쾅…’

“살려주세요” “아저씨 도와주세요”

‘아, 심상치 않는구나’ 하고 서둘러 나가려는데 마음이 급해서인지 스위치를 몇 번 누르고서야 현관문이 열렸다. 앞집에서는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문을 두드렸던 여성은 나를 보더니 울면서 주저앉아버렸다. 순간 “소화기!” 하고 소리를 지르자 집사람이 곧장 베란다에 있던 소화기를 가져다 주었다.

무작정 불이 난 곳까지 들어갔더니 가스레인지의 불이 마룻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쌀 포대부터 환풍기까지 옮겨 붙고 있었다. 안전핀을 뽑고, 손잡이를 힘껏 쥐어 소화기를 쏘았다. 그와 동시에 소화기 분말가루와 검은 연기가 눈과 목구멍으로 들이닥쳤다. 앞이 보이지 않아 출구를 찾을 수 없었고 당황해 점점 숨이 턱 막혀왔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오니 아파트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제야 잠옷 차림에 손바닥에서는 피가 흐르는 것을 발견했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라는 것도 119구급대원을 따라 구급차에 탑승하려고 한 발자국을 떼서야 알았다. 119구급대원은 친절하게 손에 묻은 피를 닦고,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30초만, 아니 10초만 늦었더라면 불길이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집어삼켰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순간 아찔했다. 급하게 달려와 화재를 진압해 준 제주소방서 소방관분들, 신속한 대피를 해준 주민들, 그리고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있던 나의 소방훈련과 가정 내 소화기가 있었기에 90여 가구는 오늘도 가로등을 벗 삼아 잠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