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렬 시인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행을 떠나는 일은 좋은 일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일,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감성을 풍부하게 해준다. 더욱이 나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떠났다. ‘제주신화연구소’가 일을 추진한 덕택이다. 8박 9일, 터키와 그리스가 그 목적지다. 떠나기 전 나는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터키의 이스탄불 하면 고작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지점이라거나, 그리스 하면 처녀(파르테노스) 아테나 수호신을 모신 파르테논 신전을 떠올리는 정도의 피상적인 예비지식밖에 없다는 점이 아마 그 이유일 것이다. 허나, 그 나라들은 그런 나의 무지를 단번에 깨뜨려버렸다.

터키 이스탄불에는 성 소피아성당이 있었다. 목재건물이었던 그 성당은 두 번의 화재로 모두 소실돼버렸다. 뒤이어 탄생한 건축물은 그야말로 비잔틴 문화의 압권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 더욱이 놀라운 것은 최근의 이슬람 정부가 과거의 기독교 문화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이 세운 이 건축물의 실내장식(천정화 및 벽화)을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 모두 덧칠해버렸다. 회칠로 가려진 것을 모두 벗겨내자 찬란한 기독교 문화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 뿌리는 같지만, 그동안 상충하던 두 개의 문화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터키의 작은 그랜드 캐니언이라 할 수 있는 곳에 뾰족한 형상의 산들이 있었다. 바위산에는 헤아릴 수 없는 문과 창들이 달려있었는데 마치 외계인 같았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기독교를 허용했던 동로마제국, 허나 당시 동로마제국의 통치자였던 리키니우스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리스도교도들을 박해했다. 이를 피해 이들은 바위산에 곡괭이를 찍고 들어가 집을 지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지하땅굴도시도 있다. 2만에서 3만에 이르기까지의 인구가 그곳에서 살았다하니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규모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기거공간과 외양간, 환기통, 학교, 교회 등이 설비돼 지상과 다를 바 없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여러 장치들이 있었고 들어가는 통로마저 작아 우리는 곤충처럼 최대한 몸을 둥글게 말고 들어가야 했다. 이도 다 계획된 설계의 하나였다. 어쨌든 살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은 그 한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인간으로 태어난 게 참 행복스러워지는 한 순간이기도 했다.

파묵칼레라는 곳도 가보았다. ‘파묵’은 목화(솜), ‘칼레’는 성이란 뜻이다. 이는 곧 ‘목화의 성(城)’이란 뜻이 된다. 버스를 타고 가며 멀리서 보니 앞에 성채 같은 백색의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설산 같다. 허나 그곳 사람들은 그 석회석산을 눈이 아니라 산더미처럼 쌓인 ‘목화’에 비유했다. 그곳은 진짜 옛 성터였다. 삶의 자취들. 그리고 폐허. 인생무상을 안 느낄 수 없다. 수심에 잠겨 걸어가는데 마침 온천이 눈에 띄었다. 거대한 야외온천,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니 수심은 온데간데없고 여독이 눈 녹듯 사라진다. 하여튼 인간이란 존재는.

밤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넜다. 터키에서 그리스로 가는 배다. 아홉 시간. 배 안에서 준비하고 간 국산소주로 한잔했다. 바깥 공기를 쐬러 갑판으로 나갔다. 어둠 사이로 하얗게 일어나는 포말과 거무죽죽하게 출렁이는 물결과 뺨을 스치는 바람의 감촉, 그리고 느닷없이 외로워지는 심사, 나는 술보다도 이국적 정서에 더 취해버린 것같다.

지면관계상 견문한 바를 여기 다 말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어쨌든 큰 소득은 이번 여행을 통해 다른 나라에 대한 나의 무지를 깨우쳤다는 점이다. 그래,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었다. 그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 반성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라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