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희성 농부시인

전국이 불볕더위다. 올해 삼복더위는 폭염 장기화 탓에 ‘무더위’라는 표현이 무색하다. 최저 기온이 섭씨 30도를 넘는 초열대야가 다반사고, 대구의 살인적 무더위를 가리키는 대프리카라는 말에 이어 서울도 찜통 더위 탓에 서프리카라는 유행어를 얻었다. 심지어 태풍 종다리의 힘을 빌면 더위가 수그러들지 않을까 기원하는 마음도 적지 않았다.

제주 또한 제프리카는 아니더라도 재난 수준의 폭염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 이십여 일 넘게 계속되는 폭염에 넙치와 가축류의 폐사가 속출하고 밭작물이 타들어가고 있다. 마을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폭염경보는 하루 서너 번씩 울렁증을 일으키고, 마을 수리계에서는 농업용수 부족을 걱정하며 과도한 물 사용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한다. 오늘은 소나기 소식이 있어 새벽잠을 설쳤건만, 병아리오줌만큼 툭툭 몇 방울 뿌리다가 그만이다. 잠시 바람이 선뜻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달력을 보니 중복은 지났고 말복이 광복절 다음날이다. 입추는 7일이고 처서가 23일이니 아직도 한 달 가까이 버텨내야 한다. 이번 여름을 과연 탈 없이 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삼복더위에 연상되는 수묵화 한 폭은 마을 정자나무 아래 평상에 둘러앉아 수박이며 참외 같은 여름 과실로 땀을 들이며 합죽선을 부치는 어르신들의 모습이다. 이보다 걸쭉한 김홍도류의 풍속화를 떠올린다면 왁자지껄 마을사람들이 어울려 천렵이나 복달임으로 더위를 이겨내는 모습이다.

요즘의 여름나기 풍속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마을 정자는 개인 집 거실로 파편화됐고, 삼복더위를 이겨내는 시절식인 ‘복달임’ 문화는 유명 삼계탕 집에 줄지어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얻어먹듯’ 서둘러 한 그릇 비우고 나오는 모습으로 희화화 되고 말았다. 천렵이나 탁족은 여름 휴가 풍경을 보도하는 방송사의 단골 그림으로 여전히 등장하고 있으나 가족 단위로 물놀이를 하는 수준이라 전래의 그것과는 흥취가 다르다.

천렵이나 복달임은 세시풍속의 흐름에 박자를 맞추면서 문화양식으로 자리잡은 여름나기의 집단지성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천렵은 주로 여름철 삼복중에 냇가에 즐기는 고기잡이로 뜻 맞는 이들끼리 어울려 하루를 즐기는 피서법이다. 풍속화가로 이름난 이서지 화백의 그림 ‘천렵’을 보면 열 명의 사내가 등장하는데 한쪽에서는 천렵과 탁족을 즐기고 있고, 한쪽에서는 매운탕 끓일 준비를 하는 모습이 정겹게 묘사되어 있다. 복달임은 삼계탕 같은 고단백의 보양식으로, 복더위에 지친 몸의 원기를 북돋는 시절식 문화다. 더 나아가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여름철 한날을 잡아 특별한 음식을 공동체의 성원끼리 함께 즐김으로써 나눔과 배려를 실천하는 미풍양속이기도 하다.

우리 마을 같은 제주 읍면지역에선 천렵이나 복달임에 내재되어 있는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 ‘마을 경로당’이라는 ‘현대적 정자 또는 냇가 공간’에서 유지되고 있음을 본다.

우리 마을 노인회원 수는 176명이다. 그 중 이틀 걸러 한번쯤은 경로당을 찾아 무료함도 달래고 더위를 피하는 분들이 많게는 팔십여 명쯤 된다고 한다. 마을 기금이나 행정에서 지원되는 자금을 가지고 노인회를 운영하는데 더 묵직한 지원은 자녀들이 내놓는 물품이며 음식, 찬조금이다. 이런저런 재원을 가지고 보름에 한번 꼴로 보양식도 챙겨 드시는 걸로 알고 있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 마을 경로당은 최적의 피서지여서, 아침 해가 뜨면 경로당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어르신들의 수가 부쩍 늘었다. 때때로 노래교실을 여는 날은 잔치가 열린 듯 흥겹기도 하다. 우리 마을 어르신들의 여름나기를 지근거리에서 보고, 들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다.

어르신들을 위한 ‘문화적 천렵이나 복달임으로 어디 좋은 게 없을까?’하는 것이다. 노래교실뿐만 아니라 예천 신풍미술관의 할머니그림교실, 성남 카네이션 마을의 어르신 악기교실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을 경로당으로 배달되어 우리 어르신들의 여름나기가 건강백세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문화적으로도 풍성해지기 바라는 마음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