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신문
기획특집아! 광해여, 광해여
조선 왕릉(王陵) 가운데 연산군과 광해군만 ‘묘(廟)’광해 유배길을 걷다 11 연산군묘 광해군묘
장영주  |  교육학 박사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8.15  13:34:16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폐위돼강화도로 축출
광해군, 인조반정으로 축출돼 묘호조차 없어


조선왕 27대(26대-1대, 26대-2대/대한제국 포함) 왕릉과 왕실계보를 분석해 봤다.
왕릉을 계보 따라 가보니 유독 연산군과 광해군 두 군데만 묘로 되어 있고 나머지 25개소는 릉으로 돼있다.

   
▲ 연산군 묘
   
▲ 광해군 묘

연산군과 광해군은 조선을 어떻게 다스렸을까?
연산군, 두산백과에 의하면 1476년(성종 7) 11월 7일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의 맏아들(적장자)로 출생했다. 어머니는 후궁이었다가 성종의 총애를 받아 왕비에 오른 윤 씨다. 당시 연산군의 어머니 윤 씨는 성종의 첫 번째 후궁이었으며 이후 연산군을 잉태하면서 비(妃)로 책봉됐다. 연산은 7세 때 세자로 책봉됐다. 1494년 성종이 사망하자 조선의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하며 선왕의 명복을 비는 불교식 행사인 수륙재(水陸齋) 시행과 외척의 등용을 두고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유생들과 갈등을 빚었고 1년 후 생모인 윤 씨가 사망하게 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후 방치된 윤 씨 능묘 천장(遷葬)두고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와 대립했다. 재위 4년인 1498년 7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史草)의 내용이 세조를 비판하고 붕당을 만들어 국사를 어지럽게 했다는 조의제문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문제 삼아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많은 신진 사류(士類)와 삼사에 속한 대간들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조선시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했다. 이후 폐비 윤 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 씨·엄 씨의 모함으로 내쫓겨 사사(賜死)됐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仁粹大妃)를 구타해 죽게 하고, 윤 씨의 폐비에 찬성했다 해 윤필상·김굉필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을 부관참시 하는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다. 또 국왕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둬 불태웠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사냥을 즐기며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 경연(經筵)을 없애 학문을 마다했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해서 언로를 막는 등 그 실정은 극에 달했다. 급기야 1506(중종 1) 훈구파를 중심으로 연산군을 폐위하려는 정변이 계획됐고 이에 이조참판 성희안·중추부지사 박원종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켰으며 연산군은 폐왕이 돼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났다. 실록에는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돼 폐위된지 두 달 만에 역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됐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해,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선조 이후 정치 세력들이 붕당(朋黨)으로 갈라지는 계기가 됐다. 당파 대립으로 인해 국력은 소진됐으며, 임진·병자 등의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했다.

광해군, 재위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들을 대상으로 수차례 옥사를 일으켰고, 외교에서는 실리외교를 선택했다. 이런 그의 정치적 태도는 결국 인조반정으로 축출되기에 이르렀고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군주가 됐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분은 어떠했는가?
연산군=성종(9대)의 폐비 윤 씨의 자식이다.
광해군=선조(14대)의 공빈 김 씨의 자식이다.

모친이 폐비를 당하는 수모를 곁에서 지켜보며 복수의 칼을 갈았던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유배도 강화도로 간건 우연한 일치일까?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기에 영화로도 제작돼 흥행몰이에 나선 것은 무엇으로 설명 할 것인가?

   
▲ 단릉(單陵):왕이나 왕후의 봉분을 단독으로 조성한 능(태조고황제-건원릉). 쌍릉(雙陵):한 언덕에 왕과 왕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능(명종·인순왕후-강릉).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한 언덕에 왕과 왕후의 봉분을 위 아래로 조상한 능(경종·선의왕후-의릉). 삼연릉(三連陵):한 언덕에 왕과 두 명의 왕후 봉분 세 기를 나란히 조성한 능(헌종성황제·효현성황후·효정성황후-경릉). 사진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봉분 형식에 따른 왕릉 유형을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의 자료를 참고해 분류했다.
조선왕릉은 조선왕실의 의례서인(국조오례)에 근거해 조성했다. 국조오례의 예는 왕과 왕후를 하나의 봉분에 안장한 합장을 기본으로 삼았으나 왕릉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난다.

문화재청조선왕릉관리소에 의하면 조선왕릉은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세계유산, ‘세계유산’이라는 특별한 개념이 나타난 것은 이 유산들이 특정 소재지와 상관없이 모든 인류에게 속하는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는 이러한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자연유산 및 문화유산들을 발굴 및 보호, 보존하고자 1972년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 보호 협약(약칭 세계유산협약)을 채택했다.
세계유산, 세계유산협약이 규정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산으로서 그 특성에 따라 자연유산, 문화유산, 복합유산으로 분류한다. 조선왕릉은 문화유산이다.

문화유산, 기념물(기념물, 건축물, 기념 조각 및 회화, 고고 유물 및 구조물, 금석문, 혈거 유적지 및 혼합유적지 가운데 역사, 예술, 학문적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유산), 건조물군(독립되었거나 또는 이어져있는 구조물들로서 역사상, 미술상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유산), 유적지(인공의 소산 또는 인공과 자연의 결합의 소산 및 고고 유적을 포함한 구역에서 역사상, 관상상, 민족학상 또는 인류학상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유산)을 말한다.

   
▲ 조선왕릉 위치안내.

참고로 제한공개가 되는 릉(묘)는 학술조사를 목적으로 관리소에 신청 후 출입이 가능함을 사전 알아 놔두면 좋다.

< 저작권자 © 제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관련기사]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63113)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공로 9-1(도두일동)  |  대표전화 : 064)744-7220  |  팩스 : 064)744-7226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제주 아 01014   |  등록일 : 2007년 2월 12일  |  발행/편집인 : 부임춘  |  청소년보호책임자 : 부임춘
Copyright 2011 제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ejupress@jejupres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