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랜만에 섬에 온 작가 황석영을 만났다. 저녁 약속 시간에 좀 늦게 주점 ‘박달재’에 들어가니 홀에 셋이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가 가까이 가자 황 작가가 그간 세월이 흘러 변해 버린 우리들에 대해 소리쳤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이 1975년이니까 내 나이 스물셋, 그는 서른셋. 그해 여름 소라街(?)의 한 실비집이었고, 그 후 5년 전후로 여기에 와서 만난 곳도 늘 작은 주점이었다. 처음 그는 알맞게 기른 머리에 균형 잡힌 몸매와 키, 미끈한 얼굴, 달변, 훈훈한 체취로 함께했던 또래 몇을 이내 흡인시켰다.

그때 우린 소주를 연신 들이켰지만 오늘은 막걸리로 바뀌어졌다. 짧게 깎은 머리, 볼이 들어간 얼굴도 달라졌다. 그리고 어언 70대 중반. 글 쓰기 위해 지방에 내려와 있는데 축제 기간이라 소란스러워 2, 3일 내려왔다 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문학 여정을 얘기한다. 앞으로 십 년은 쓰리라며 장편 4편을 쓰겠노라 한다. 작가가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면 원로로서 어디 가 축사나 하며 슬슬 지내는 경우가 많지만 그럴 순 없다고, 매너리즘에 빠지면 끝이 아니냐고 한다.

하기야 그는 1993년 방북 사건으로 투옥되어 5년을 지내고 나와 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모랫말 아이들’,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소리’ 등을 잇달아 써 내며 끊임없이 자기 갱신의 길을 걸어왔다.

2010년엔가 소설 ‘낯익은 세상’을 쓸 때 여기 와서 한두 달 머물었는데, 놀기 좋아하는 작가는 저녁이 되면 부근의 ‘번지 없는 주막’으로 이틀이 멀다고 나왔다. 그 때도 늘 K, M 등이 옆에 있었고. 그래 그런지 그 소설은 별로 재미를 못 본 듯하다. 익숙한 여주인이 내 준 닭볶음탕을 맛있게 먹으며 그는 연신 앞으로의 문학 여정에 대해 말했다. 베토벤이 ‘교향곡’ 등을 작곡하여 명성이 높아지고 더 이룰 게 없을 듯 했으나 그는 안주하지 않고 다른 색채의 ‘현악4중주’라는 또 다른 금빛 성채를 이루어냈다고. 노벨문학상, 헤밍웨이, 로맹 가리 얘기도 했다. 오래 쓰려면 몸 관리를 잘 해야 해 아점으로 여러 야채를 넣어 간 주스와 계란을 넣은 낫또를 먹고 일정 시간 걷는다고. 그의 부단한 창작의 소출은 이런 엄격한 자기 관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늘 현재형 작가이고자 한다.

1971년 내가 열아홉 살 때, 그의 등단 다음 해 어느 월간지에 나온 단편 ‘줄자’를 빨려가듯 읽은 후 다 읽진 못했지만 그의 소설은 거의가 명품이었다. 그것은 천부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기야 스무 살 때 단편 ‘입석 부근’으로 등단을 했으니까.

늘 책상물림으로 학교에서만 살아온 나 같은 이에게 그와의 만남은 늘 경이롭다. 고교 자퇴 가출, 한일회담 반대시위 참가, 유치장에서 건설노동자와 만나 떠돌며 공사장에서의 일, 입산, 행자 노릇, 베트남전 참전. 문화 운동, 방북, 망명, 수형 생활, 쉼 없는 창작 활동.

‘박달재’를 나와 큰길까지 걸어가며 나는 그와 비아그라니, 시알리스니 하며 조용히 웃어댔다. 그는 숙소로 가기 위해 건널목을 건너고, 나와 M형은 어디로 갈까 하다 ‘번지 없는 주막’을 접은 그녀가 대학교 앞에 차린 퓨전 음식점 ‘나인’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그와 만난 지 열흘이 지났지만 지금도 큰 나무 곁에 있었던 기운이 느껴진다. 그는 사십 여 년 동안 섬 속에서 작아지려는 나에게 때때로 와 힘을 주고 가곤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