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전(版殿)! 추사 김정희가 71세 병든 몸으로 남긴 대작이다. 본디 서울 봉은사 판전 처마에 걸린 편액이다. 탁본 전시물인데도 대가의 필력이 곁에서 보는 듯 생생하고 웅혼하다. 대정읍 추사기념관을 찾은 것은 오늘로 세 번째다. 그 세 번 다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이 이 편액 글씨다. 세속의 잣대를 뛰어넘은 대가의 자유자재에 순진무구함까지 녹아 있다.

　이번 나들이는 천주교 대정성지 정난주마리아의 묘를 시작으로 추사기념관을 거쳐 단산(바굼지오름), 모슬포성당까지 이어지는 정난주 천주교순례길 일부를 답사하는 것이다. 서울서 내려온 소설가 신흥래 선배가 장편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대정현 곳곳을 둘러본다기에 서둘러 따라나섰다. 신 선배가 고심중인 작품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신유박해가 역사적 배경이다. 정약용의 조카이자 황사영의 처로 37년간 대정현 노비 신분으로 유배당해 온갖 시련과 질곡을 견디면서도 신앙의 증인으로 살다간 정난주마리아의 일대기 성격이다.

　‘정난주마리아의 묘’에 차를 두고 나선 답사길은 대정향교까지 걸어나갔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근 20㎞, 오십 리 길의 여정이었다. 묘역을 떠날 때는 햇살이 환해 발걸음이 가벼웠지만, 대정향교 쪽까지 와서는 지치기도 하고 바람이 사나워 한참 애를 먹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커피 한 잔으로 몸을 녹이려 들어간 카페가 커피코냑을 제조, 선보이는 김영한 선생의 ‘작가의 집’(제주커피수목원)이었다. 김 선생은 마케팅과 경영전략서 위주의 저서를 67권이나 낸 저술가이자 경영 컨설턴트다. 6년 전에 ‘추사처럼 쓸쓸해지고 싶어’ 대정향교와 이웃한 곳에 세한도 누옥을 본뜬 집과 여러 채의 커피농장 하우스를 짓고 ‘커피농장 커피농부’로 사는 중이다. 초면인데도 ‘얼굴이 형제처럼 닮았다’며 함께 인증샷을 찍고, 최근 고심중인 집필계획과 커피농장의 비전까지 들려주시는데 칠순 노익장의 열정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렇게 필연 같은 ‘만남’을 뒤로 하고 되돌아오는 길에, 당연지사로 들른 곳이 추사기념관이었다. 기념관과 추사 적거지를 돌아보는 동안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또 한번 골똘해졌다.

　길은 이렇게 성찰과 소망 그리고 떡국 위의 고명처럼 맛과 멋을 완성하는 ‘만남’을 선물한다. 한편 길과 관련해 올해론 풀기가 틀려버린 숙제가 떠오른다. 퇴계 선생이 걸었던 안동의 ‘예뎐길’을 함께 답사하겠다는 이동춘 사진가와의 약속이 그것이다. 마침 이동춘 사진가의 ‘예뎐길을 가다-도산구곡 사진전’(서울 강남구 선릉로 유경서원)이 2월 말까지 연장 전시된다는 소식에 다시금 조바심이 도졌다.

　도산서원 방문과 퇴계가 걷던 ‘예뎐길’ 답사는 올핸 이 작가의 사진작품 감상으로 대신하고, 결행은 천상 내년 봄으로 미뤄야겠다. 길은 역사로 열리고 사람으로 빛난다는데, 나는 ‘예뎐길’에서 어떤 역사와 사람을 만날지 벌써부터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