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 걷기에 알맞도록 간편한 복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가끔 가는 노코메 오름을 오를 작정이다. 오늘의 산행은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를 담아볼 요량으로 특별하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의 태양과 다를 바도 없지만 그저 무의미하게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수는 없다. 다시 열두 달을 살아가면서 삶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보고 싶었다.

시내를 벗어나 이십여 분을 달려 오름 주차장에 도착했다. 한겨울이면서도 파란 하늘에서 따스한 햇살이 내리고, 용암이 흘러내려 함몰된 형상의 곡선이 매우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젊은 여인의 몸매다. 여느 오름들의 자태와 다를 바 없지만 이 오름의 산행은 사방이 확 트인 목장 길을 따라 걷다가 숲길로 접어드는 신비한 매력이 있어서 좋다. 숲은 깊지 않으나 오르막내리막으로 들숨과 날숨을 급하지 않는 속도로 쉴 수 있어서 편안하다.

겨울 산의 숲은 나목으로 전신을 드러내어 휑하다. 아직도 푸른 옷을 입고 우두커니 서있는 소나무가 한 여름날 오리털 잠바를 입고 해수욕장을 거니는 것과 같아 불편스럽지만 그들은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만족함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햇살이 따사로울 산등성이를 바라거나 물이 있는 골짜기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 아는 그들에게서 시기나 질투 또는 탐욕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더러워진 속물로 비춰지는 나의 모습이 부끄럽다. 인간 역시 자연생태계 속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람도 계속 자라고 가지를 뻗는 나무들처럼 매일 변화하고 껍질을 벗을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거짓과 위선의 껍질을 벗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난다는 것을.

비어 있는 숲의 정적을 깨뜨린 것은 까마귀였다. 예전 같으면 검고 음흉한 모습을 한 것에 불쾌의 화살을 던질 녀석이었지만 뭔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입에 풀질할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난한 숲에서 한 겨울을 지내야 하는 그들에게 동정심이 드는 것이다. 괜한 생각이었다. 숲을 이루는 풀과 새들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씨앗을 퍼뜨리고 둥지를 틀며 살아간다. 그들에게도 희로애락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은 연민과 폭력, 사랑과 증오, 이기심과 이타심, 무시와 존중 등 다양한 속성들이 있지는 않을까.

오름 정상에 올랐다. 평일이라 그런지 산행객이 없어 한가롭다. 멀리 내다보이는 시내는 짙은 회색의 미세먼지가 덮고 있었다. 어둡고 침울하게 보이는 저 곳에서도 새해에 대한 희망이 싹 트고 있을 것이다. 새해에는 가족들이 건강하고 화목하기를 바라는 그런 꿈을. 또다시 한 해를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고단한 삶의 여정이겠지만 쉬어갈 수 있는 사랑의 쉼터들이 많았으면 더욱 좋겠다. 새해에는 아픈 상처를 마음에 품고 다니며 곱씹지 말자. 몸에 옻이 올랐을 때 긁으면 가려움이 해소되기는커녕 온몸에 생채기만을 남길 뿐이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고 한다. 자신의 불행을 내 탓이 아니라 남의 탓으로 여겨 불평불만이 있는 사람들에게 행복이 머무를 공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행복을 잡고 싶다면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의 곳간을 넓게 가져야겠다. 행복은 주어지는 모든 것에 감사함에 있지 않을까.

황금돼지해에는 사랑을 함께 나누는 사회가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시기와 질투, 탐욕이 사라지고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