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에서 자신이 낯선 환경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마음 둘 곳이 없다는 고독감과 외로움이 엄습해 올 때, 마치 로빈손 크루스처럼 무인도에서 표류생활을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절해고도의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자신의 섬 안에서 어둠이 더욱 짙어지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견고한 성벽을 쌓고 자신을 가둬버리지만 결국은 바깥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푸성귀 같은 아침이다. 텃밭 곳곳에서 잡초들이 쪼뼛이 봉오리를 열고, 텃새들이 울타리 사이에서 보스락보스락 머리를 내밀고 있다. 하늘을 날던 봄가치도 덩달아 싹튼 감나무를 점령한다. 사나흘 세상을 덮쳤던 미세먼지를 밀어내고 수줍게 얼굴을 드러낸 해가 하늘을 꽉 채우며 넉넉한 햇살로 다가온다.

봄은 밖으로 나가자고 유혹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미세먼지로 외출을 삼가라는 찝찝했던 뉴스거리에서 벗어나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오름으로 향했다. 태양이 떠오르고 산의 능선이 붉게 물든 시간, 이슬진 소나무 잎에서는 송진 냄새가 풍겨오고, 산에서는 햇빛을 기다리며 한꺼번에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린다. 신선한 자연 속에서 모든 나무와 새들과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평온함 그 자체다. 내가 살아온 일상에서 이렇게 자연과 함께 하며 행복을 느낀 적이 별로 없다.

시나브로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는 가슴이 원하는 그런 삶을 살아왔을까. 아마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항상 남의 기준에 맞추고 사회의 암묵적인 동의에 의문 없이 따라가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그것이 만족스럽고 행복한 시간이었을까.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순 없다. 짜여 진 시간표에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 나의 영혼을 맡기고, 타인이 써준 대사를 열연하는 연예인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스스로를 무시하고 무시당하며 견디는 것이 직장인의 역할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진심으로 나를 만나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배려하는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자서전 ‘추억’에서 삶 속에 운 좋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느끼는 친밀감만큼 근사한 것은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우리 삶을 지탱하는 불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낯선 사람들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우리의 잠과 고독을 지켜보고 우리의 위험과 약함을 지켜주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오는 사랑을 느끼는 것은, 그것은 우리 존재의 범위를 넓혀 주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 준다고 했다. 아가페적인 사랑의 모습이다.

사랑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속살을 만지는 것. 외양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사랑의 단계에서 첫 단추를 잘 못 꿴 것과 다름없다. 사람 생김새를 보고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가를 지레 짐작하는 것은 관계성에 엄청난 오류를 범한다. 우리가 먹는 과일의 겉은 빨강, 노랑 등 각양각색이지만 껍질을 벗겨놓고 보면 무슨 과일인지 구별하기보다 맛이 어떤가를 생각한다. 맛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살에 있는 것이다. 달콤한 속살을 먹기 위해 이기적인 삶은 버려야겠다. 자신이 옳은 길을 걷고 있다고 해서 그 길만이 옳은 것이 아니다. 그 길은 많은 옳은 길 중의 하나일 뿐이다. 행복한 관계는 상대방의 순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찾아온다. 정말로 아무 기대나 주장 없이 존재와 존재로 만나는 것이다.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방향이 과연 공동체가 원하는 행복의 방향인가, 아니면 개인의 이익을 위한 방향인가를 생각해볼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