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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랑 남은 한 장의 달력
김구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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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2.03  16:4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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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랑 남은 한 장의 달력에 눈이 어리다. 이미 떠난 이들이 남긴 자리를 지키려고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듯 꼿꼿하지만 왠지 춥고 외로워 보인다. 찬바람이 겨드랑이를 스쳐 지나가자 텃밭 무화과나무는 춥다 춥다고 자꾸만 움찔대며 몇 남지 않는 잎사귀들을 떨어뜨리고 있다. 가을인가 했지만 계절의 초시계는 겨울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을 떠난 들녘이 아버지가 떠난 빈방처럼 허전하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느새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섬뜩함으로 다가온다.

이쯤이면 크리스마스 캐럴이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들려왔고, 반쯤 열린 화원의 출입문 사이로 빨간 포인세티아가 구세주의 탄생을 속삭이듯 했었다. 작은 은방울과 하얀 솜, 형형색색의 장식들을 단 크리스마스트리가 거리의 한복판에서 반짝거렸고, 코트 깃에 감기는 캐럴을 들으며 걷던 도시의 기억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변화의 물결 속에 추억마저 흘러가버리고 남은 것은 추수 끝난 들판에 홀로 선 허수아비와도 같다. 소금에 절여진 배추처럼 시들어진 존재에게 희망을 찾아 볼 수가 있을까.

오늘날 사람의 냄새를 맡으며 어우러져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상대방의 잘못을 더욱더 찾아내려 하고, 온갖 나쁜 의도를 꾸며내어 앙갚음하려는 분노의 불길이 희망의 숲을 태우고 있다. 다양성에서 나타나는 현상임에도 그것을 부인하고 되돌릴 수 없는 처지가 돼버렸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지만 거쳐야 할 고갯길이라고 생각하면 희망은 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러 개의 고갯길을 넘으면서 살아가고 간다. 저마다 넘고 싶다고 넘을 수도 넘기 싫다고 넘지 않을 수도 없는 고갯길이다.

삶의 굴곡에서 내려놓아야 할 짐들이 많을 것이다. 나그네의 봇짐과 같이 과거 아픈 기억들은 고단함에서 버려야 할 짐들이다. 그래도 아내의 전화번호나 아파트의 비밀번호들은 봇짐 속에 남아 있어야 했다. 늦은 밤 아파트 현관에서 흔드렁거리는 숫자와 싸우다 기진맥진해 주저앉을 때가 있다. 주량이 약해지거나 노안으로 초점이 흐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기억의 저장고가 텅텅 비어간다는 사실에 서글픔을 느낀다. 그것만이 아니다. 동행의 삶을 함께 한 아내의 모습이 요즘 따라 측은하다. 숱한 인고에 찌들려 검디검던 머리에 빈자리가 송송 보이고 호수같이 맑았던 눈가에는 가느다란 잔주름이 잔잔하다.

문득 오염되지 않은 휴식 시간을 자적하며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삶의 여정에서 내 곁을 스쳐간 소중하고 아름다운 인연들이 새벽하늘의 별들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스러져 가는 공허함에 빠져들기도 한다. 살며시 찾아오는 세월의 강물에서 천천히 되새김질하는 우직한 황소처럼, 삼켜버린 하루의 기억들을 반추하고자 하지만 매정한 시간은 허락하지 않는다. 어두움과 빛은 수없이 교차한다. 빛은 어두움을 뚫고 순환의 과정에서 가고 오는 삶을 생각하게 한다. 생이란 번쩍하는 불빛 속에 스쳐가는 섬광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과 무엇이 다른가.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날개 달린 마음으로 새벽에 일어나 사랑의 또 하루를 향하여 감사하게 되기를, 정오에는 쉬며 사랑의 황홀한 기쁨을 명상하기를, 황혼엔 감사하며 집으로 돌아오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의 삶을 정리하고자 했다.

달랑 남은 한 장의 달력을 바라보며 지나온 열두 달의 시간들을 되새김질 하는 황소의 여유를 갖고 싶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던 모든 것들을 반성하고 치유의 기적을 바라는 마음을 담고 하루하루를 보내려 한다. 12월의 마지막 날, 생각 없이 뜯어내는 매정함 보다는 감사함과 그리움의 대상으로 보내고 싶다. 단순한 종이 한 장의 숫자가 아니라 지난한 순간들을 남긴 삶의 자리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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