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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대한 변명
김성률  |  교사/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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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2.05  17: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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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은 내 앞에 놓여있다 /  나는 안다 이 길의 역사를 /  길은 내 앞에 놓여있다 /  여기서 내 할 일을 하라 / (중략)  가자 또 가자 /  모든 것 주인되는 길 (후략)]

 젊은 날 눈물을 섞고 희망을 섞어 부르던 노래였다. 바닷가에서 벗들과 어울려 부르고 또 불러 제끼던 어쩌면 울부짖음에 가까웠던, 노래라기보다는 외침이었으며 함성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한 잔의 술을 나누며 울분과 희망을 담아 소리쳤었다. 


 시를 주절거리고, 개똥철학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놀이를 즐기던 시절이었다. 정치를, 경제를, 사회를, 문화를…. 우리는 우리 그릇으로 퍼 담았다. 그런데도 늘 차지 않는 마음의 공허를 한 잔의 술로 달랬었다.

 철없는 청춘들이 바라본 그 막막했던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데모’ 밖에는 없었다. 우리는 가진 게 너무 없었고, 같잖게 떠드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었다. 그것이 더 분했고 우리는 성질만 사나워지고 있었다. 한결같이 조급했고 하나같이 들떠 있었다. 결국 우리는 분노의 정점에서 한계상황에 봉착했다. 신기한 것은 우리의 그런 분노와 달리 세상은 평온했으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는 더 커져 갔다. 꿈꾸던 세상은 더 망가졌으며, 희망은 변질되고 있었다. 역사의 진보는 길게 봤을 때의 추상화 같은 것이 되고 있었다.

 최소한 우리의 머리 속에서는 그랬다.  우리는 뭔가가 절실했다. 하지만 그 절실함에 다가가는 방법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더 조급했던 사람들은 적응의 방향을 택했고, 그것마저 못한 사람들은 부적응의 상태로 삶을 흘려보내야 했다. 지금도 궁금하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길은 없었을까?

 어설프게나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여유를 찾는 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 분노가 수증기 같은 것이 아니라 어쩌면 어느 땅 속에서 밑거름이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다소 자만스러움으로 자신에게 조금은 너그러웠더라면 어땠을까? 

 어느 날 ‘길’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좋아하던 시인이자 전사였던 김남주는 늘 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시에는 곳곳에서 길을 찾는 전사의 의지가 나타난다. ‘길은 내 앞에 놓여 있다’ 그랬다. 그는 놓여있는 길을 피하지 않고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는 자신을 살피기보다는 세상을 바꿔 행복하고자 했다. 그는 나의 우상이다. 

 김남주처럼 살지 못하는 나는 늘 그를 선망하지만 이제 내 자신의 조급함도 달래주고 싶다. 그래서 내 시선이 가는 곳에 있는 사람과 사랑과 풀벌레와 이슬과 세상을 이루는 작은 것들을 바라보며 조금은 여유롭고 싶다. 책망받기가 일상이던 나에게 변명거리를 주고 싶다, ‘허나 어쩌랴, 유약한 나도 살아야겠고, 나처럼 유약한 것들과 사랑하는 것도 삶이 아니랴…’ 하는. 변명으로 봄을 맞는다. 어쩌면 변질되어 가고 이기적일지라도…. “너는 변했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뜨거운 사랑으로 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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