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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중앙로에 있던 ‘광해군 적소터’…당시 엄격히 통제광해 유배길을 걷다 9 적소터
장영주  |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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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25  1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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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19년 유배생활 중 제주에서 4년…67세로 사망
참을 수 없는 모욕 자주 당해…계집종은 ‘영감’ 호칭
광해 시신 한양으로 올려 보낼때 ‘별도 포구’로…추론

   
▲ 화북성조: 별도포 안에 몇 척이 배가 정박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메인 화면 호연금서에도 몇 척이 배가 별도포로 들어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 할 때 조천포(연북정이 있어 관아들이 오고가는 길목)보다 제주목(제주모점에 의하면 제주성지가 표시되어 있다)에 가까워 정사를 돌보기에 편리한 위치라고 판단된다.

‘광해군적소터’라고 적힌 표지석은 제주시 이도1동 국민은행 지점에 가면 입구 옆에 ‘광해의 적소(謫所)로 전해져온 터, 귀양살이 하다가 병사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광해는 폐위된 뒤 유배를 거듭하다 마지막으로 어등포로 귀양 와 거기서 1박한 후 제주목(제주도성)으로 호송됐다. 이 때 광해가 머물렀던 곳을 적소터라 한다.

   
▲ 적소터: 제주시 중앙로 현 국민은행 지점 자리였다.

위리안치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따르면 제주에 유배온 광해는 제주 서성(西城)안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됐는데, “두문(杜門)하여 자물쇠로 봉한 후 도사(都事) 등 5인은 서울로 올라갔고 속오(束伍) 유진군(留鎭軍) 중에서 30명이 윤번으로 수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뤄 보아 광해는 제주에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외부의 출입과는 엄격히 통제된 유배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위리안치 모습: 안동 화훼마을에서 비슷한 것을 찾았다. 광해가 위리안치된 곳 주변을 탱자나무로 둘러싸이게 했다. 다른 기록에는 벽돌 등으로 울타리를 만들었다는 것으로 봐서 관아 소속 숙박지라고도 볼 수 있다.

1640년(인조 18) 9월 제주 목사로 부임한 이시방이 광해를 잘 돌보았으나, 결국 1641년(인조 19) 음력 7월 1일 제주목 내의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광해가 죽자 인조는 5일간의 소찬으로 조의를 표하고 예조참의 채유후를 보내어 초상 치르는 것을 맡아보게 했으며 각 도의 감사에게는 같이 따라가 초상 치르는 것을 감독하도록 했다. ‘7월 3일 소렴(小斂)하고 4일에 입관(入棺)하여 7월 27일 관덕정에서 대제(大祭)를 거행한 후 제주 삼읍을 윤회(輪廻)하고서 8월 5일에 배를 띄웠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되돌아와서 정박하다가 8월 18일 제주를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제주3읍 목민관 총람, 판관 편/이형상의 남환박물). 당시 제주 목사 이시방과 제주도민들은 조정에서 예관이 도착할 때까지 예를 갖춰 호상(護喪)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덧붙여, 조선왕조실록의 인조 19년 7월 10일자 기록을 보면 광해가 죽자 당시 목사 이시방이 즉시 열쇠를 부수고 문을 열고 들어가 손수 염빈(殮殯)했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 제주읍성 고적: 출처 제주시의 옛터, 제주시, 1996. 원 안(②번)이 서성안 서문이다.
   
▲ 광해 적거지: 출처 제주시의 옛터, 제주시, 1996. 왼쪽 중앙부 원형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이다.

결국 광해는 19년 유배 생활 중 마지막 4년을 제주도에서 보내다 67세로 사망했다.

광해가 최후를 마친 이 적소터에 대한 기술은 조선인이 아니라 외국인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묘사돼 있다. 유명한 하멜표류기의 저자 하멜은 1653년 무역선 스페르베르 호를 타고 자카르타를 떠나 나가사키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제주도로 표류하했다. 그때(1653년) 8월 21일자 일기에 보면 ‘우리는 어느 집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그 집은 지금의 왕의 아저씨가 왕위를 찬탈하려다가 갇혀 죽은 곳이라 한다’(출처: 하멜표류기, 신봉룡 역주, 집문당, 1999.)라고 기록된 것으로 봐 광해 적소터는 꽤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적소터는 제주 관아의 일부였거나 관의 손님들이 머무는 역관 같은 곳으로 생각되며 일화를 보면 광해는 주변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자주 당했던 듯하다. 유배소의 계집종이 광해를 ‘영감’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보인다.

별도포
별도포는 화북 포구의 옛 이름이다. 한 때 전남 강진과 영암을 잇는 제주의 관문으로 터 잡았던 화북포구는 별도라는 지명이 의미하듯 칼로 애를 끊는 듯 한 사연 많은 이별의 현장이다(조승훈, 포구, 나라출판, 1996). 여기에는 엉물머리와 금돈지라는 포구가 둘 있다. 조선 영조 11년 1735년 당시 김정 목사는 별도포와 산지포를 축조하기 위해 관록 3백석을 희사하고 제주목·정의현·대정현 등지의 장정들을 동원 부역케 했다. 김정 목사는 직접 돌을 지고 나르며 공사를 독려했다. 이 때 고유문을 지어 심정을 나타내었다(…모든 나라의 제사에 이 섬 물건이 모두 나가나 왕명이 드날리는 화북포를 돌아보면 큰 바다의 끝이 되고 이 섬의 목구멍과 같사옵니다…오래도록 지탱하여 배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하옵소서). 김정 목사는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려고 화북진성에 체류 중 과로로 숨을 거뒀다. 화북포구에는 그를 기리는 공덕비가 있다(제주향토문화사전, 김찬흡, 금성문화사, 2014). 산지항이 축조되기 전까지 별도포는 제주의 관문으로 유배의 길목이기도 했다. 유배인 들이 귀양살이의 애절한 심정을 제주뱃길 한편에 자리 잡은 관탈섬에서 관복을 벗고 제주목으로 인계하는 가장 가까운 별도포로 들어오는 게 상례인바 광해의 시신을 한양으로 올려 보낼 때 이 포구를 이용했을 것이란 추론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한양에서 광해 시신을 인도하러온 관인들이 이 포구를 통해 들어 왔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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